title

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한의학의 유명인물-지석영(池錫永·1855~1935)

한의학의 유명인물-지석영(池錫永·1855~1935)

지석영 선생은 조선 말기의 한의사로 고종시대와 대한제국시대에 醫科 출신이 아닌 文科 출신 醫官으로 활약했다.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이며 본관은 충주(忠州)다. 1855년 서울 원동(현재의 종로구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아버지와 절친한 사이였던 한의사 박영선의 문하에서 한학과 의학을 배웠다. 이때 그는 봉건제도의 폐해를 통감하여 개화사상을 갖게 되었고, 스승의 영향을 받아 의학을 평생토록 공부하고 연구하였다.  

그는 중국에서 들여온 서양의학서의 번역본을 많이 읽었고, 한역(漢譯)한 의학서적을 통해 제너의 우두법(우두 접종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때마침 1876년(고종 13) 수신사(修信使) 김기수(金綺秀)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가게된 스승 박영선(朴永善)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우두법의 실황을 조사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서 박영선은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 가쓰아키(久我克明)의 ‘種痘龜鑑’을 얻어다 그에게 전해주었다.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우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 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 덕산면(德山面)에 들러 40여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1880년 서울로 올라와 종두법을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고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 송아지)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 50병(柄)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軍醫)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어 종두를 실시하고 그 방법을 각 군에서 뽑혀 올라온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그가 우두법을 도입하기 전에 다른 종류의 종두법인 인두법이 민간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1886년에 서양의사 알렌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서울 거주자 100명 가운데 60~70명이 인두법에 따른 종두 시술을 받았다고 한다. 현재까지 최초의 우두 접종자로 그와 같은 한의사들인 이재하, 최창진, 이현유 등이 같이 거론되고 있지만 우두 종두법 보급에 지석영의 활약과 영향력이 가장 컸다.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로 급제,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1885년 ‘牛痘新說’을 저술, 1887년 장령(掌令)으로 시폐(時弊)를 논하다가 우두의 기술을 미끼로 일본과 결탁한 개화당과 도당을 이룬다는 이유로 전라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풀려난 후 승지(承旨)를 거쳐 1896년(고종 33) 동래부사를 지냈고 우두법의 보급에 공헌하였으며, 1899년 관립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1907년 통감부에서 의학교를 폐지하고 1908년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할 때 교장직에서 쫓겨나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10년에 사직하였다.

그는 의학교육사업에 종사하는 한편 한글 보급에 힘써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1909년 ‘字典釋要’를 지어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그는 1914년에 의생(醫生)자격을 취득하고 소아과(幼幼堂) 진료를 하였다. 1915년에는 전선의생회(全鮮醫生會~현재의 한의사협회에 해당) 회장을 지냈으며 1935년 81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