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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9일 목요일

의림촬요

한국고전번역원-의림촬요(해제보기) 《의림촬요(醫林撮要)》의 편찬과 증보 과정   이경록 1. 머리말 조선 의학을 논의할 때 곧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의서는 1610년에 편찬된 《동의보감(東醫寶鑑)》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의서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의림촬요(醫林撮要)》이다. 《의림촬요》는 《동의보감》만큼 주목받아온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당시에 《의림촬요》는 그 편제의 방대함은 말할 것도 없고, 초간본(初刊本)의 등장 이후 곧바로 증보와 간행 작업이 이어질 정도로 중시된 의서였다. 《의림촬요》와 그 저자에 대해서는 특이하게도 《의림촬요》의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에 소개되어 있다. 양예수(楊禮壽)- 자(字)는 경보(敬甫)이고 호(號)는 퇴사옹(退思翁)이며 홍농(弘農) 사람이다. 의술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며 《의림촬요(醫林撮要)》 8권을 찬술하였다. - 《의림촬요》에서 《의림촬요》를 소개할 수 있었던 까닭은, 본문에서 서술하듯이 현존하는 《의림촬요》가 증보된 판본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의림촬요》에 대한 당대의 1차 기록은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실려 있다. 《의림촬요(醫林撮要)》- 우리나라 내의(內醫) 정경선(鄭敬先)이 편찬하고 양예수(楊禮壽)가 교정(校正)하였다. - 허준은 《의림촬요》를 양예수가 아니라 정경선이 편찬하였다고 적었다. 허준은 양예수와 동시대 인물일 뿐만 아니라 내의원(內醫院)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이기도 하다. 《의림촬요》에 대해 잘 알고 있을 허준의 언급은 신뢰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의림촬요》의 간행 경위는 말할 것도 없고 저자부터 살펴볼 필요가 제기되는 것이다. 나아가 《의림촬요》의 편제와 그 특징에 대해서도 논의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본문에서는 양예수에 대해 먼저 살펴본 다음 《의림촬요》의 간행 경위를 정리하고, 그 구성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2. 양예수와 《의림촬요》의 편찬 《내의선생안(內醫先生案)》은 조선의 왕실 의료기관인 내의원에서 근무한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정리한 문서이다. 허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자료는 선조 38년(1605)에 작성을 시작하였으며 순조 12년(1812) 이후까지 계속 내용을 증보하였다. 《내의선생안》에서는 양예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양예수(楊禮壽)- 자(字)는 경보(敬甫) -. 홍농(弘農) 사람-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하),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 겸(兼) 사복장(司僕將), 양천현령(陽川縣令), 호(號)는 퇴사옹(退思翁) -. 이에 따르면 양예수의 자는 경보이고, 본관은 홍농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홍농은 청주양씨(淸州楊氏)가 이칭(異稱)으로 사용하는 본관이다. 청주양씨는 중국 홍농(弘農) 사람인 당숙우(唐叔虞)의 후손이어서 중국 지명을 그대로 본관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치 자신들의 선조와 관련된 중국 지명을 따서 성주이씨(星州李氏)를 농서이씨(隴西李氏)라고 표현하거나 능성주씨(綾城朱氏)를 신안주씨(新安朱氏)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내의선생안》에는 양예수의 최고 품계를 자헌대부, 관직을 행동지중추부사로 간단히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최고 직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양예수의 이력을 실록(實錄), 방목(榜目), 문집(文集)들에서 수집하여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양예수의 주된 이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종 4년(1549) 의과(醫科) 식년시(式年試)에 합격. 자는 경백(敬伯), 본관은 청주(淸州 서원(西原)), 거주지는 한양〔京〕. 관직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심약(審藥). 아버지는 진위장군(振威將軍) 부사용(副司勇)인 양건(楊建) 명종 18년(1563) 9월 20일 내의(內醫) 양예수가 세자〔順懷世子〕를 치료 명종 19년(1564) 12월 21일 내의 양예수가 오랫동안 주부(主簿 종6품)로 근무하여 예빈시 판관(判官 종5품)으로 승진 명종 20년(1565) 4월 12일 대왕대비가 사망하자 신하들이 양예수 등의 의관들을 추국할 것을 주장 명종 20년(1565) 10월 9일 양예수가 통정대부(通政大夫 정3품)로 가자(加資) 명종 22년(1567) 6월 28일 명종 사망으로 진료를 담당한 양예수 등의 내의들이 의금부에 하옥 선조 3년(1570)~선조 6년(1573) 양예수가 유희춘(柳希春)과 그 가족 및 지인들을 지속적으로 치료 선조 11년(1578) 7월 4일 내의원 제조의 요청으로 상인(喪人)인 내의 양예수에게 서울로 올라오게 했으나, 양예수는 여묘(廬墓)를 살면서 복(服)을 마치겠다고 상소 선조 13년(1580) 11월 27일 의관 양예수에게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하)를 가자 선조 18년(1585) 8월 24일 양예수 아들의 방목(榜目) 기사에 양예수 관직이 행부호군(行副護軍)으로 표기 선조 19년(1586) 10월 8일 어의(御醫) 양예수에게 가의대부(嘉義大夫 종2품 상)를 가자 선조 20년(1587) 12월 9일 선조를 치료한 공으로 어의 양예수 등에게 녹비(鹿皮)를 하사 선조 28년(1595) 6월 11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ㆍ同知事) 양예수가 세자를 치료하자 말 1필을 하사 선조 30년(1597) 1월 16일 세자 질병을 치료한 공으로 양예수 등 4명에게 작질(爵秩)을 더한 것을 신하들이 반대 선조 30년(1597) 4월 14일 의관 양예수ㆍ허준ㆍ이공기와 침의(針醫) 5명이 선조를 침으로 치료 선조 32년(1599) 7월 24일 임진왜란 중 수안(遂安)에 머무르던 중전(中殿)을 호위한 공으로 의관 양예수 등에게 말 1필을 하사 선조 33년(1600) 12월 1일 사망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ㆍ知事) 양예수에게 우승지를 통해 부의(賻儀) 광해군 4년(1612) 3월 13일 양예수 아들의 방목(榜目) 기사에 양예수의 최종 품계를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상), 관직을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로 표기 그런데 동시대를 살았던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양예수의 젊은 시절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젊은 양예수는 문신(文臣)이자 문인(文人)인 정사룡(鄭士龍)을 만났다, 정사룡이 시험삼아 읽고 있던 책을 그에게 잠깐 가르치자 양예수는 곧바로 줄줄 외우면서 틀리는 곳이 전혀 없었다. 정사룡이 크게 놀라며 ‘너의 재주로 문장을 배운다면 내 의발(衣鉢)을 전해 줄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녹봉 받는 벼슬자리가 다급했던 양예수는 결국 의과(醫科)에 응시하였고 명의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양예수의 집안에 대해서는 청주양씨 족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족보에 따르면 양예수는 청주양씨(淸州楊氏) 서평군파(西平君派) 8대손(9세손)이다. 양예수의 고조인 양자순(楊子淳)은 서산군수(瑞山郡守)를 지냈고 증조인 양담(楊澹)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이었다. 하지만 조부인 양세호(楊世豪)가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결사(判決事)로 추증되고, 아버지인 양건(楊健)은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좌윤(漢城左尹)으로 추증되었다고만 기록된 것으로 보아 양세호와 양건은 관운(官運)이 없었다. 즉 《어우야담》의 기록처럼 양예수의 대에 이르러서는 집안이 한미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양예수의 형인 양인수(楊仁壽)는 의관이면서 선조의 잠저(潛邸) 시절 스승이었는데, 선조가 양인수를 승진시키려 하자 이조에서는 그가 미천(微賤)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반대한 데서도 양예수 집안의 문지(門地)가 그리 높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건과 그 부인인 청도김씨(淸道金氏)는 양인수(楊仁壽), 양예수(楊禮壽), 양신수(楊信壽), 양지수(楊智壽)를 낳았다. 양예수에 대해 족보에서는 “부사(府使)이며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이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이다. 부인〔配〕은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이다. ○묘(墓)는 강화(江華) 홍해리(弘海里)이다.”라고 하였다. 양예수의 아들은 양홍무(楊弘茂), 양홍도(楊弘度), 양홍주(楊弘澍)이며 딸은 오흥조(吳興祖)에게 시집을 갔다. 양예수의 형제 가운데에는 양인수 외에 양지수도 의관이었다. 양지수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을 꾸짖으며 강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양예수의 집안은 의업(醫業)으로 대를 잇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양예수의 아들 가운데 양홍무와 양홍도는 생원(生員)으로 되어 있으며, 양홍주는 참봉(參奉)으로 족보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양홍무와 양홍도는 사마방목(司馬榜目)에서 보다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양홍무는 명종 14년(1559)에 태어났는데, 선조 18년(1585) 식년시(式年試)에 생원 3등(三等) 41위 즉 전체 합격자 100명 중 7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리고 양홍도는 선조 4년(1571)에 태어났는데, 광해군 4년(1612) 식년시에 생원 3등(三等) 62위 즉 전체 합격자 100명 중 92등으로 합격하였다. 두 명 모두 생원시에 급제했으므로 의술에 종사한 것은 아니다. 이상의 자료를 정리한다면,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던 양예수(?~1600)는 명종 4년(1549) 의과에 합격한 이래 선조대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의관으로 점차 성장하였다. 양예수와 양인수ㆍ양지수가 의관으로 활동하였지만, 그의 집안이 대대로 의업에 종사하지는 않았다. 양예수는 왕실 가족들이나 명종의 사망으로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는 대체로 국왕들의 신임 속에 왕실 의료를 담당하였다. 관직 생활에서는 지방의 심약(審藥)이나 양천현령(陽川縣令) 같은 외직(外職)을 맡기도 하였지만, 의관 생활의 대부분은 내의원에서 보냈다. 따라서 양예수가 《의림촬요》를 편찬할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것은 틀림없다. 《의림촬요》에는 편찬 목적을 직접 알려주는 서문이나 발문이 없다. 하지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통해 그 편찬 동기는 이해할 수 있다. 기운이 변하고 풍토가 각기 달라 옛날에는 알맞았더라도 지금은 알맞지 않으며 중국(中國)에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 용도에 맞는 것은 취하고 부적합한 것은 버려야 비로소 전서(全書)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지난 선조조(宣祖朝)에 고(故) 명의(名醫) 양예수(楊禮壽)에게 명하여 《의림촬요(醫林撮要)》를 편찬하게 한 것입니다. 이 책이 한번 나오자 단지 약을 의논하고 조제할 때 사람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7자 원문 빠짐 -… 한번 책을 펴면 증상에 대해 조제하는 것을 알 수 있어 그 혜택이 넓고…- 5자 원문 빠짐 -….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의림촬요》는 조선의 풍토와 실정에 적합한 의서로 편찬되었으며, 특히 증상에 따른 조제에 아주 편리한 실용적인 의서였다. 그런데 인용문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양예수가 선조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의림촬요》는 일종의 관찬의서(官撰醫書)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의림촬요》는 내의원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양예수와의 관련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이 내의원과 연관되어 편찬되었음은 그 간행 기록을 살펴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원래의 《의림촬요》에 대한 설명은 머리말에서 언급한 두 가지이다. 《의림촬요》는 내의(內醫) 정경선(鄭敬先)이 편찬하고 양예수(楊禮壽)가 교정(校正)하였다는 허준의 기록과 《의림촬요》는 양예수가 8권으로 편찬하였다는 〈역대의학성씨〉의 기록이다. 허준은 양예수와 함께 내의원 어의로서 선조를 진료한 기사들이 자주 등장하는 데서 보이듯이 양예수를 잘 알고 있었다. 〈역대의학성씨〉 역시 당대에 편찬된 자료이므로, 양예수에 대한 설명에 오류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위 기록을 신뢰한다면, 원래의 《의림촬요》는 정경선이 편찬하고 양예수가 교정을 완료한 의서로서 8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경선이란 사람은 실록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크게 이름을 떨치지는 못한 의관인 것이다. 하지만 내의원 의관들을 시대순으로 정리한 《내의선생안》에는 정경선이 보인다. 이 가운데 한 면인 〈그림1〉을 보면 양예수, 허준, 정경선이 모두 등장한다. 양예수와 허준의 설명이 상세한 데 반해 정경선에 대해서는 짧게 언급되어 있다. 정경선(鄭敬先) - 내의원 정(正 정3품) - . 〈그림1〉에서 보이듯이 정경선은 양예수나 허준과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양예수나 허준과 동시대의 인물이라는 의미이다. 김홍균의 연구에 따르면, 정경선은 경주정씨(慶州鄭氏)로 중종 31년(1536)에 태어나 선조 17년(1584)에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양예수는 1549년에 이미 식년시에 합격했으므로 1536년생인 정경선보다는 연배가 높다. 한편 정경선이 역임한 정3품인 내의원 정(正)은 내의원 규정상 의관이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기도 하다. 정경선이 정치적으로는 출세하지 못했지만, 내의원 의관으로 꽤 오래 근무하고 상당한 실력도 갖추었던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내의선생안》의 기록까지 보완해서 이해하자면, 원래의 《의림촬요》는 양예수가 의서 편찬을 책임지고, 정경선이 편찬 실무를 담당한 것이다. 선조의 명으로 양예수가 편찬을 시작하였으므로 내의원 의관인 정경선이 실무에 투입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의림촬요》의 편찬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허준은 ‘정경선이 편찬하고 양예수는 교정하였다’고 상세하게 표현한 것이고, 후대에는 《의림촬요》가 양예수의 저작으로 알려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정경선과 양예수의 편찬 역할 분담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오랜기간 내의원에서 활동한 양예수 역시 《의림촬요》의 편찬에는 깊숙이 관여했을 것이다. 현존하는 《의림촬요》에는 각 권 서두마다 퇴사옹 양예수가 편찬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원래의 《의림촬요》는 8권으로 되어 있었으며, 1615년 이후 〈역대의학성씨〉가 정리될 때까지도 8권본 형태로 존재하였다. 편의상 정경선과 양예수가 편찬한 이 《의림촬요》를 ‘《의림촬요》 초간본(初刊本)’이라고 부르겠다. 《의림촬요》 초간본의 간행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초간본이 남아 있지도 않고 간행 시기를 명시하는 기록도 보이지 않는다. 포괄적으로 언급하자면, 《의림촬요》 초간본은 선조의 명을 받아 양예수가 편찬하였으므로 선조 즉위년인 1567년에서 양예수가 사망한 1600년 사이에 간행되었다. 실제로 《의림촬요》는 곧이어 1610년에 편찬되는 《동의보감》에서 33조가 인용되며, 초간본이 인쇄되었다는 점은 《승정원일기》에서도 확인이 된다. 그런데 앞의 양예수 연보를 다시 살펴보면 선조대에 양예수의 의관 기록이 본격화되는 것은 선조 13년(1580) 가선대부를 가자(加資) 받은 때부터이다. 그리고 정경선의 사망 연도는 선조 17년(1584)이었다. 즉 《의림촬요》 초간본의 간행 시기를 조금 더 압축하자면 1580년대 초반에 간행되었을 수 있다. 3. 《의림촬요》의 증보 경과 1600년 양예수가 사망하고 몇 년 뒤에는 《의림촬요》를 보완하는 의서가 간행되었다. 목활자(木活字)로 인쇄한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 2권 2책이다. 이 책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권1이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도서관에 권2가 소장되어 있다. 《의림촬요속집》 권2 본문 마지막에는 “만력(萬曆) 36년(1608, 광해군 즉위년) 9월 일, 내의원에서 인쇄하다. 감교관(監校官)은 통훈대부 행내의원판관 신(臣) 이객(李), 감교관은 통훈대부 행내의원주부 신(臣) 이희헌(李希憲)이다.”라는 간기(刊記)가 들어 있다. 이객과 이희헌은 인쇄 시의 교정 책임을 지는 감교관(監校官)이므로, 이들은 《의림촬요속집》의 편찬자가 아니다. 이희헌은 1615년에 내의원에서 간행한 《신간보주석문황제내경소문(新刊補註釋文黃帝內經素問)》을 감교(監校)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의림촬요속집》의 편찬자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608년 내의원에서 《의림촬요속집》을 간행했음은 확인이 된다. 그렇다면 《의림촬요속집》과 《의림촬요》의 관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의림촬요속집》은 1608년 간행이며, 현존하는 《의림촬요》 삼간본(三刊本)이 1676년 간행이라는 점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분명하다. 〈표2〉에서 보이듯이 현존하는 《의림촬요》는 재간본(再刊本)보다는 삼간본(三刊本)이 많으므로, 여기에서는 《의림촬요》 삼간본으로 분석해보자. 《의림촬요속집》과 《의림촬요》 삼간본에서 내상문(內傷門)의 기록을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의림촬요속집》:보진고(補眞膏), 운림윤신환(雲林潤身丸), 구선왕도고(九仙王道糕), 익기환(益氣丸), 향사양위탕(香砂養胃湯), 향사평위산(香砂平胃散), 신선불취단(神仙不醉丹), 백설고(白雪糕), 보화환(保和丸), 가감보중탕(加減補中湯), 백출환(白朮丸), 오매환(烏梅丸), 불취방(不醉方). 《의림촬요》 삼간본:병론(病論), 주하(注夏), 식치(食治), 식기(食忌), 익비원(益脾圓), … 삼령환(參苓丸), 삼출건비탕(蔘朮健脾湯), 보진고(補眞膏), 운림윤신환(雲林潤身丸), 구선왕도고(九仙王道糕), 익기환(益氣丸), 향사양위탕(香砂養胃湯), 향사평위산(香砂平胃散), 신선불취단(神仙不醉丹), 백설고(白雪糕), 보화환(保和丸), 가감보중탕(加減補中湯), 백출환(白朮丸), 오매환(烏梅丸), 불취방(不醉方). 굵게 표시한 부분에서 두 의서의 기록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보진고~신선불취단은 인용 의서가 《만병회춘》이고, 백설고~불취방은 인용 의서가 《단계심법부여》라고 표기된 것까지 일치한다. 《의림촬요속집》과 《의림촬요》 삼간본에서는 《만병회춘》과 《단계심법부여》의 처방들을 순서까지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의림촬요》의 다른 병문들에서도 《의림촬요속집》의 기사들은 처방 말미에 덧붙여져 있다. 즉 《의림촬요》의 각 병문은 병론→처방들→울법(熨法 찜질법)→구법(灸法 뜸 치료법)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의림촬요속집》의 기사들은 처방들과 울법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그런데 현존하는 《의림촬요》 삼간본이 양예수가 직접 편찬한 내용 그대로라면, 양예수 사후에 편찬된 《의림촬요속집》은 《의림촬요》 초간본의 축약본(縮約本)이지 ‘속집(續集)’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양예수가 편찬한 《의림촬요》 초간본의 내상문 처방들 말미에, 다시 말하면 삼출건비탕 다음에 《의림촬요속집》 기록을 덧붙여서 현존하는 《의림촬요》 재간본(1635, 인조13)과 삼간본(1676, 숙종2)이 만들어진 것이다. 《의림촬요》 삼간본에서는 《의림촬요속집》의 문장을 대체로 충실하게 인용하였지만, 열람의 편의를 위해 깔끔하게 문장을 다듬기도 하였다. 중풍문(中風門)의 문장을 비교해보자. 용성단(龍星丹)은 여러 종류의 풍열(風熱)로 인해 담연(痰涎)이 가득 찬 것을 치료하는데, 별도로 간 편뇌(片腦), 우황(牛黃), 사향(麝香)이 3자(字)씩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대조를 위해 원문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의림촬요속집》:龍星丹. 治諸風熱, 壅痰涎盛. …片腦- 另硏三字 -ㆍ牛黃- 另硏三字 -ㆍ麝香- 另硏三字 -…. 《의림촬요》 삼간본:龍星丹. 治諸風熱, 壅痰涎盛. …片腦ㆍ牛黃ㆍ麝香- 並另硏, 各三字 -…. 《의림촬요속집》에서는 약재별로 일일이 ‘별도로 간 것 3자(字)〔另硏三字〕’라고 한 데 반해 《의림촬요》 삼간본에서는 ‘세 약재 모두 별도로 간 것, 이상의 약재들은 각 3자(字)〔並另硏, 各三字〕’라고 깔끔하게 문장을 다듬은 것이다. 이제 《의림촬요속집》에서 《의림촬요》 삼간본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두 의서의 편제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표1〉 《의림촬요속집》과 《의림촬요》 삼간본의 편제 비교 의서 병문(病門) 순서 《의림촬요속집》 중풍문 (中風門) 유중풍문 (類中風門) 예방중풍문 (預防中風門) 상한문 (傷寒門) 중한문 (中寒門) 온역문 (瘟疫門) 반진문 (癍疹門) 《의림촬요》 삼간본 중풍문(中風門) 부유중풍(附類中風) 부예방중풍(附預防中風) 통풍문 (痛風門) 상한문(傷寒門) 부중한(附中寒) 온역문 (瘟疫門) 반진문 (斑疹門) 위 표는 《의림촬요속집》과 《의림촬요》 삼간본의 권1~권2 앞부분의 병문 순서를 비교한 것이다. 〈표1〉에서는 《의림촬요속집》의 내용들이 《의림촬요》 삼간본으로 통합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양예수가 편찬한 8권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아마도 중풍문(中風門)→통풍문(痛風門)→상한문(傷寒門)→온역문(瘟疫門)→반진문(斑疹門) 등의 순서로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의림촬요속집》에서는 〈표2〉에 보이는 바와 같이 중풍문(中風門)→유중풍문(類中風門)→예방중풍문(預防中風門)→상한문(傷寒門)→중한문(中寒門)→온역문(瘟疫門)→반진문(癍疹門) 등의 순서대로 보완하였다. 《의림촬요속집》에서는 풍(風)과 관련된 내용과 한(寒)과 관련된 내용 등이 증보된 것이다. 그리고 《의림촬요》 초간본과 《의림촬요속집》을 합하여 《의림촬요》 재간본과 삼간본이 만들어질 때는 《의림촬요속집》의 ‘중풍문(中風門), 유중풍문(類中風門), 예방중풍문(預防中風門)’이 ‘중풍문(中風門) 부유중풍(附類中風) 부예방중풍(附預防中風)’으로 한데 묶였다. 《의림촬요속집》이 간행된 이후에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가 별도로 만들어진다. 〈역대의학성씨〉의 작성자가 양예수가 아니라는 점은 〈역대의학성씨〉에서 양예수와 허준을 수록하는 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양예수가 〈역대의학성씨〉를 작성하였다면, 양예수 스스로가 자신을 〈역대의학성씨〉의 한 사람으로 자부하면서 ‘의술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고 소개하는 셈이 되므로 아주 이상해진다. 〈역대의학성씨〉의 작성 연도를 구체적으로 추정하자면 허준 소개에 등장하는 몇 가지 내용들이 단서가 된다. 〈역대의학성씨〉에서는 허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허준(許浚)- …관직은 숭록대부(崇祿大夫) 양평군(陽平君)에 이르렀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25권, 《언해두창집(諺解痘瘡集)》 1권, 《언해태산집(諺解胎産集)》 1권, 《언해구급방(諺解救急方)》 1권, 《신찬벽온방(新纂辟瘟方)》 1권을 찬술하였다. - 위 기록에서 허준이 숭록대부로 임명된 것은 1606년이고, 《동의보감》 편찬은 1610년이고, 간행은 1613년 이다. 그리고 《신찬편온방》 편찬은 1612년이고, 영의정으로 추증된 것은 1615년 허준 사망 이후의 일이다. 결국 〈역대의학성씨〉는 1615년 이후에 만들어진 자료인 것이다. 양예수는 1600년에 이미 사망하였으므로 〈역대의학성씨〉의 저자가 될 수 없다. 이처럼 별도로 편찬된 〈역대의학성씨〉가 《의림촬요》에 합본된 시기는 1615년에서 1635년 사이이다. 1635년은 《의림촬요》가 다시 간행된 해이다. 《의림촬요》 재간이 요구된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의림촬요》를 구하기가 어려워졌다는 점도 있지만, 특히 이괄(李适)의 난(1624, 인조2) 때문이었다. 《의림촬요》 초간본은 의료 관서에 배포되고 지방에도 유포되었으나 이괄의 난으로 산실되었다. 지방에 나누어 주었던 《의림촬요》를 거두어도 권질이 다 갖추어지지 않는 지경이었다. 처방에 소용되는 약재량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민간을 분주히 뒤지며 다닐 정도였다. 이 때문에 호조(戶曹)와 병조(兵曹)의 물자를 매매하여 그 이식(利息)으로 《의림촬요》를 재간(再刊)하자는 논의가 나타났다. 하지만 《의림촬요》의 인출(印出)이 실제로 진행된 것은 논의가 시작된지 거의 10년이 지나서였다. 인조 12년(1634) 8월 1일에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인출하기 시작하였는데 공장(工匠)들에게 소요되는 비용은 도체부(都體府), 총융청(摠戎廳), 상평청(常平廳), 사복시(司僕寺) 등에서 부담하였고, 드디어 이듬해인 인조 13년(1635) 2월 22일에 내의원(內醫院)에서 인쇄와 반포를 막 마쳤다고 보고하였다. 인조 13년의 목활자본(木活字本)을 ‘《의림촬요》 재간본(再刊本)’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의림촬요》 재간본은 치료 시에 널리 활용되었다. 간단히 두 개의 활용 사례만 들자면 인조의 귓병에 대해서는 《의림촬요》 이병문(耳病門)에 나오는 투이통(透耳筒) 처방을 참고하였고, 현종을 치료할 때는 《의림촬요》의 가미국화산(加味菊花散)을 토대로 삼았다. 〈그림2〉에서 보이듯이 《의림촬요》 재간본은 13권본이다. 권13 본문 마지막에는 인출기(印出記)가 있다. 당시 간행에 참가했던 내의원의 도제조는 윤방(尹昉), 제조는 최명길(崔鳴吉), 부제조는 정백창(鄭百昌)이며 감교관은 내의원 의관인 윤홍임(尹弘任)과 송경일(宋擎日)이었다. 《의림촬요》 재간본과 뒤이어 다룰 《의림촬요》 삼간본을 비교해보면 〈그림2〉와 같다. 〈그림2〉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재간본과 삼간본의 본문은 완전히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 본문 말미의 인출기가 재간본에는 있고, 삼간본에는 없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따라서 《의림촬요》 재간본 권1은 현존하지 않지만, 《의림촬요》 삼간본과 마찬가지로 권1의 첫머리에는 〈역대의학성씨〉를 수록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그림2〉에서 재간본과 삼간본의 글씨를 유심히 대조해보면, 목활자(木活字)로 만든 재간본에서는 나무의 결이 일부 보이며, 글자를 나무에 새긴 탓에 글씨가 약간 딱딱한 느낌을 준다. 현재 《의림촬요》 재간본은 〈표2〉에서 정리하듯이 한독의약박물관, 허준박물관, 성암고서박물관,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의림촬요》는 지금까지 살펴본 재간본과 함께, 이제 살펴볼 숙종 2년(1676)의 삼간본(三刊本)이 존재한다. 두 판본이 시차는 41년인데, 현존하는 《의림촬요》는 대부분이 《의림촬요》 삼간본이다. 조선에서는 국가기관에서 도서를 인쇄한 이후에 반사기(頒賜記)를 작성하였다. 도서 배포자 명단을 작성하여 국왕에게 보고한 것이다. 국왕은 명단 중에서 해당자를 낙점하는 방식으로 도서를 하사하였다. 이때 국왕이 하사한 이른바 내사본(內賜本)들은 하사 기록〔內賜記〕이 도서 표지 안쪽에 적혀 있는데, 현존하는 《의림촬요》들 역시 내사기가 남아 있다. 서울대 규장각의 《의림촬요》에는 “강희(康熙) 15년(1676) 11월 19일, 행부호군(行副護軍) □□□에게 《의림촬요》 1건을 내사(內賜)한다. 감사 인사는 면제한다. 우승지(右承旨) 신(臣) 정(丁) 아무개 〔수결〕”라는 내사기(內賜記)가 적혀 있다. 또한 대구가톨릭대도서관의 《의림촬요》에도 “강희 15년(1676) 11월 19일, 이조좌랑(吏曺佐郞) 이담명(李聃命)에게 《의림촬요》 1건을 내사한다. 감사 인사는 면제한다. 우승지(右承旨) 신(臣) 정(丁) 아무개 〔수결〕”라는 내사기가 적혀 있다. 그리고 동일한 시기인 숙종 2년(1676) 11월에는 송정렴(宋挺濂, 1612~1684) 역시 《의림촬요》를 하사받았다. 3군데 기록에서 내사된 시점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숙종 2년에 《의림촬요》가 삼간되면서 곧바로 반사(頒賜)된 정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서울대 규장각의 《의림촬요》 설명에 따르면 규장각 소장 《의림촬요》는 무신자(戊申字) 곧 사주갑인자(四鑄甲寅字)로 인쇄되었다. 무신자는 현종 9년(1668) 김좌명(金佐明)이 호조 및 병조의 물자와 인력을 사용하여 수어청(守禦廳)에서 주조한 금속활자이다. 이 무신자(戊申字)로 몇 년 뒤인 숙종 2년(1676)에 《의림촬요》를 삼간(三刊)한 것이다.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의림촬요》 재간본과 삼간본의 권별 소장처는 다음과 같다. 〈표2〉 《의림촬요》 재간본과 삼간본 소장처 권 재간본 삼간본 권1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권2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권3 서울대 규장각 권4 한독의약박물관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계명대 권5 허준박물관 대구가톨릭대 권6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권7 성암고서박물관 서울대 규장각 권8 고려대 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권9 고려대 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한독의약박물관 권10 고려대 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권11 대구가톨릭대 권12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계명대 권13 고려대 도서관 서울대 규장각, 대구가톨릭대, 경북대, 한독의약박물관 《의림촬요》 권1(서울대 규장각본)의 규격을 살펴보면, 표지 크기는 22cm☓34.4cm, 본문의 반곽(半郭) 크기는 첫페이지의 경우에 18.4cm☓25.8cm이다. 반곽 크기는 본문 쪽수마다 미세하게 달라지는데 예컨대 17.7cm☓25.2cm의 반곽도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의림촬요》는 편찬 이후 몇 차례의 증보 과정을 거쳤다. 이를 간단하게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3〉 《의림촬요》의 편찬 증보 과정 내용 시기 권수 비고 《의림촬요》 초간본 간행 1567~1600년 8권 정경선 편찬, 양예수 교정 《의림촬요속집》 간행 1608년 (광해군 즉위년) 2권 편자 미상, 이객ㆍ이희헌 감교 〈역대의학성씨〉 작성 1615~1635년 - 편자 미상 《의림촬요》 재간본 간행 1635년(인조13) 13권 목활자본, 《의림촬요속집》과 〈역대의학성씨〉를 합본 《의림촬요》 삼간본 간행 1676년(숙종2) 13권 금속활자본(무신자), 《의림촬요》 재간본과 동일한 내용 〈표3〉에 나온 바와 같이 정경선의 실무 작업을 토대로 양예수는 8권으로 된 《의림촬요》 초간본을 편찬하였다. 간행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의료 관서와 지방에 유포되었다는 후대의 기록으로 미루어, 양예수가 사망하는 1600년 이전에 내의원에서 간행되었을 것이다. 《의림촬요》 초간본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1608년에는 《의림촬요속집》 2권이 《의림촬요》 초간본의 미진한 처방을 보완하여 간행되었다. 이후 이괄의 난(1624) 등으로 《의림촬요》 초간본이 희소해지자, 《의림촬요》 초간본과 《의림촬요속집》을 합본하면서 〈역대의학성씨〉를 책 앞부분에 덧붙인 증간본이 간행되었다. 바로 1635년에 목활자로 간행된 《의림촬요》 13권본(재간본)과, 다시 41년 뒤인 1676년에 금속활자(무신자)로 간행한 《의림촬요》 13권본(삼간본)이다. 이 국역본에서 대본으로 삼은 것은 《의림촬요》 삼간본이다. 4. 《의림촬요》의 편제와 특징 《의림촬요》 본문에서 권1의 맨 처음에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가 실려 있음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다. 〈역대의학성씨〉에는 총 224명의 인물이 수록되어 있다. 상고(上古)의 성현(聖賢)〔上古聖賢〕은 복희씨(伏羲氏)를 비롯한 13명, 유의(儒醫)는 장기(張機)를 비롯한 41명, 명의(明醫)는 편작(扁鵲)을 비롯한 103명, 세의(世醫)는 누호(樓護)를 비롯한 28명, 덕의(德醫)는 서문백(徐文伯)을 비롯한 18명, 선선도술(仙禪道術)은 장상군(長桑君)을 비롯한 19명, 본국명의(本國明醫)는 양예수(楊禮壽)와 허준(許浚) 2명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의림촬요》의 〈역대의학성씨〉는 《의학입문(醫學入門)》〈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에 등장하는 215명의 전기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여기에 중국 의학자 7명(진무택, 송 태종, 왕도, 이천, 왕새, 공신, 공정현)과 조선 의학자 2명(양예수와 허준)을 추가 수록한 것이었다. 〈역대의학성씨〉를 통해 동양의학의 원류를 정리하고자 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역대의학성씨〉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각종 질병을 다룬다. 중풍문(中風門)을 비롯한 다양한 병문(病門)들이 배치되어 있다. 각 병문별로는 질병의 원인과 그 기전을 다루는 병론(病論)을 필두로 처방들→울법(熨法 찜질법)→구법(灸法 뜸 치료법)의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식이요법〔食治〕, 금기 음식〔食忌〕까지 중요하게 다루는 점이 독특하다. 중풍문(中風門)에서 잡방(雜方)에 이르는 120개의 《의림촬요》 병문을 권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권1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 중풍문(中風門)‚ 통풍문(痛風門)‚ 상한문(傷寒門) 권2 온역문(瘟疫門)‚ 반진문(斑疹門)‚ 내상문(內傷門)‚ 서증문(暑證門)‚ 습증문(濕證門)‚ 종창문(腫脹門)‚ 조증문(燥證門) 권3 화열문(火熱門)‚ 울증문(鬱證門)‚ 비만문(痞滿門)‚ 열격문(噎膈門)‚ 구토문(嘔吐門)‚ 탄산문(呑酸門)‚ 해역문(咳逆門)‚ 적취문(積聚門)‚ 기증문(氣證門)‚ 담음문(痰飮門) 권4 해수문(咳嗽門)‚ 성음문(聲音門)‚ 학질문(瘧疾門)‚ 곽란문(霍亂門)‚ 설사문(泄瀉門)‚ 이질문(痢疾門)‚ 탈항문(脫肛門) 권5 허손문(虛損門), 변탁문(便濁門), 노극문(勞極門), 정충경계건망문(怔忡驚悸健忘門), 전광간증문(癲狂癎證門), 치증문(痓證門), 궐증문(厥證門), 사수문(邪祟門) 권6 삼소문(三消門)‚ 각기문(脚氣門)‚ 위증문(痿證門)‚ 마목문(麻木門)‚ 산증문(疝症門)‚ 현훈문(眩暈門)‚ 두통문(頭痛門)‚ 제충문(諸蟲門)‚ 위완통문(胃脘痛門)‚ 복통문(腹痛門) 권7 요통문(腰痛門)‚ 협통문(脇痛門)‚ 이통문(耳痛門)‚ 비병문(鼻病門)‚ 면병문(面病門)‚ 안목문(眼目門)‚ 구설문(口舌門)‚ 아치문(牙齒門) 권8 후비문(喉痺門)‚ 혈증문(血症門)‚ 치루문(痔漏門)‚ 한증문(汗證門)‚ 임폐문(淋閉門)‚ 비결문(秘結門)‚ 황달문(黃疸門) 권9 제독교상문(諸毒咬傷門)‚ 상손문(傷損門), 탕화상(湯火傷), 금창(金瘡), 전촉입골방(箭鏃入骨方), 죽목침자입육방(竹木鍼刺入肉方), 장창(杖瘡), 옹저문(癰疽門), 취잉골법(取剩骨法), 부골저방(附骨疽方), 둔옹방(臀癰方), 내저방(內疽方), 폐옹방(肺癰方), 심옹방(心癰方), 간옹방(肝癰方), 신옹방(腎癰方), 위완옹방(胃脘癰方), 장옹방(腸癰方), 유경방(乳梗方), 내암방(嬭巖方), 변독방(便毒方), 나력방(瘰癧方) 권10 결핵방(結核方), 영류방(癭瘤方), 정종방(疔腫方), 낭옹방(囊癰方), 단독방(丹毒方), 은진방(癮疹方), 제악창방(諸惡瘡方), 제선방(諸癬方), 감창(疳瘡), 천포창(天疱瘡), 겸창(膁瘡), 동창(凍瘡), 두창(頭瘡), 열창(熱瘡), 이해창(頤頦瘡), 금사창(金絲瘡), 인면창(人面瘡), 칠창(漆瘡), 음식창(陰蝕瘡), 와창(蝸瘡), 반화창(反花瘡), 월식창(月蝕瘡), 누창(漏瘡), 전풍(癜風), 개창(疥瘡), 신장풍창(腎臟風瘡), 나풍문(癩風門), 파상풍문(破傷風門), 액기문(腋氣門), 염발방(染髮方), 괴질(怪疾) 권11 부인문(婦人門), 구사방(求嗣方), 태전문 상(胎前門 上) 권12 태전문 하(胎前門 下)‚ 산후문(産後門)‚ 소아문 상(小兒門 上) 권13 소아문 하(小兒門 下)‚ 두창(痘瘡), 잡방(雜方) 위의 병문 편제에서 드러나듯이 《의림촬요》는 부인과와 소아과까지 망라한 종합의서이다. 질병을 누락하지 않기 위하여 《의림촬요》에서는 유사한 내용을 연관되는 병문에 집중시켰다. 예를 들자면 중풍문에는 중풍(中風)과 흡사한 것들을 부록시키거나〔附類中風〕, 중풍 예방법을 함께 다루었다〔附預防中風〕. 이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의림촬요속집》에 나온 내용을 포괄한 것인데, 《의림촬요》가 증보되면서 점차 정교해져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림촬요》 본문에서는 인용하는 처방들의 출전을 명기하였다. 인용 도서들로는 고대 이래의 의서들도 망라되어 있지만, 특히 세 가지가 주목을 끈다. 첫째는 기존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의림촬요》는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 유완소(劉完素)ㆍ장종정(張從正)ㆍ이고(李杲)ㆍ주진형(朱震亨))의 의학 이론, 다시 말하면 금(金)나라와 원(元)나라에서 이루어진 중국의학의 새로운 양상을 적극 수용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나아가 금원사대가의 이론을 매개로 《황제내경》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동의보감》에서 《황제내경》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는 역할을 하였다. 유완소ㆍ장종정ㆍ이고ㆍ주진형은 〈역대의학성씨〉에 모두 소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의림촬요》 본문에서 그들의 의학이 수시로 인용된다. 예를 들어 중풍문(中風門)의 병론에서는 “옛사람들의 중풍에 관한 주장을 살펴보면, 중풍 원인을 하간(河間 유완소(劉完素))은 화(火)라고 주장했고, 동원(東垣 이고(李杲))은 기(氣)라고 주장했으며, 단계(丹溪 주진형(朱震亨))는 습(濕)이라고 주장하였다.”라고 하였다. 《의림촬요》 전체로 보면, 특히 이고와 주진형이 자주 소개되고 있다. 둘째는 명(明)나라의 의서들이 《의림촬요》에 상당수 등장한다. 《의림촬요》의 인용 의서들을 저자 및 편찬 연도와 함께 살펴보면 《단계심법부여(丹溪心法附餘)》(방광, 1536년 간행), 《의가필용(醫家必用)》(윤춘년, 1544), 《명의잡저(明醫雜著》(왕륜, 1549년 간행), 《의학입문(醫學入門)》(이천, 1575년 간행), 《만병회춘(萬病回春)》(공정현, 1587년 편찬) 등이다. 양예수가 활동했던 시기의 중국 의서들이 상당수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의림촬요》가 최신 의학지식을 최대한 수용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의림촬요》의 인용 의서들을 살필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존하는 《의림촬요》 재간본과 삼간본은, 양예수가 직접 편찬한 《의림촬요》 초간본을 토대로 1608년에 별도로 간행된 《의림촬요속집》을 합본한 책이기 때문이다. 우선 양예수 자신도 《의림촬요》를 편찬할 때 《의가필용》이나 《명의잡저》 같은 최신 의서를 참고하였다. 하지만 《의림촬요속집》에서는 더 나아가 《단계심법부여(丹溪心法附餘)》, 《고금의감(古今醫鑑)》, 《의학입문(醫學入門)》, 《만병회춘(萬病回春)》을 집중적으로 소개하였다. 《단계심법부여》 등은 양예수가 편찬한 《의림촬요》 초간본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의서들이었다. 즉 《의림촬요》 증보 과정에서 최신 의서들이나 주진형 이론에 대한 조선 의학자들의 수용이 계속 진행된 것이다. 최신 의학지식에 대한 관심은 조선 의학자들로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의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의방유취》 편찬을 통해 세상의 모든 의학을 통합 정리하고자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의학 지식의 통합이란 외래 지식의 수용에 머무는 한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조선만의 의학을 체계화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동의보감》의 편찬이 바로 중국의학과는 구별되는 조선만의 의법을 구성하려는 노력이었다. 셋째는 조선의 의서들이 《의림촬요》에서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고려의 《제중입효방(濟衆立效方)》을 비롯하여 조선전기의 대표적인 의서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방유취(醫方類聚)》는 《의림촬요》에서도 인용되고 있는데, 특히 《향약집성방》의 인용빈도가 높다. 그리고 양예수가 활동하던 시기와 그리 멀지 않은 조선 중종대의 《간이벽온방(簡易辟瘟方)》과 《촌가구급방(村家救急方)》 역시 《의림촬요》에서 인용되고 있다. 심지어 양예수가 창제한 처방〔本國退思翁所製方〕도 《의림촬요》에 수록되어 있다. 중국 의서들보다는 인용 분량이 떨어지지만 《의림촬요》가 조선전기의 의학적 성취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5. 맺음말 본문에서는 우선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저자인 양예수에 대해 살펴본 후 《의림촬요》의 간행 경과를 추적하였으며, 《의림촬요》의 편제와 특징을 다루었다. 이상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미한 출신인 양예수(?~1600)는 명종 4년(1549) 의과에 합격한 이래 당대를 대표하는 의관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명종과 선조의 신임 속에 왕실 의료를 담당하면서 관직 생활의 대부분을 내의원 의관으로 보냈다. 《의림촬요》는 정경선의 실무 작업을 토대로 양예수가 8권으로 편찬하였다. 선조의 명에 따라 조선의 풍토와 실정에 적합한 의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 의서를 《의림촬요》 초간본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초간본은 현존하지도 않고 그 간행 시기도 명확하지 않지만, 1600년에 사망한 양예수의 생전에 내의원에서 간행되었을 것이다. 이어 1608년에는 《의림촬요》 초간본의 미진한 처방을 보완하여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 2권 2책이 간행되었다. 편찬자는 알 수 없지만 이객과 이희헌이 감교(監校)하여 내의원에서 간행된 의서였다. 2권이 모두 현존하므로, 《의림촬요》의 증보 과정을 추적하는 데 유용하다. 그리고 허준 사후인 1615년에서 1635년 사이에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가 작성되었다. 이것은 《의학입문》의 〈역대의학성씨〉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중국 의학자 7명과 조선 의학자 2명(양예수와 허준)을 증보한 것이었다. 그 후 이괄의 난 등으로 《의림촬요》 초간본이 희소해졌다. 이 때문에 《의림촬요》 초간본과 《의림촬요속집》을 합본하면서 〈역대의학성씨〉를 책 앞부분에 덧붙인 증간본이 간행되었다. 인조 13년(1635)에 목활자로 간행된 《의림촬요》 13권본(《의림촬요》 재간본)과 숙종 2년(1676)에 금속활자(무신자)로 간행된 《의림촬요》 13권본(《의림촬요》 삼간본)이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의림촬요》는 삼간본이다. 《의림촬요》의 체재를 살펴보면 권1의 맨 처음에 〈역대의학성씨〉가 실려 있다. 그리고 중풍문(中風門)을 위시하여 부인문(婦人門)과 소아문(小兒門)에 이르는 종합의서의 체재를 갖추고 있다. 120개의 병문(病門)에서는 질병을 설명하는 병론(病論)을 맨 앞에 배치한 후 처방들→울법(熨法 찜질법)→구법(灸法 뜸법)을 차례로 설명하였으며, 식이요법〔食治〕과 금기 음식〔食忌〕까지 다루고 있다. 《의림촬요》에서는 다양한 의학지식을 활용하고 있는데, 그 인용 도서들의 특징으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중국의학의 새로운 양상인 금원사대가(金元四大家)의 의학 이론을 적극 채용하고, 《의림촬요》가 편찬되던 무렵의 명(明)나라 의서들을 최대한 수용하며, 《향약집성방》이나 《의방유취》 같은 조선의 의서들이 지속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림촬요》가 최신 의학지식에 대한 깊은 관심을 유지하는 동시에 조선전기의 의학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1. 자료 《의림촬요(醫林撮要)》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 《동의보감(東醫寶鑑)》 《내의선생안(內醫先生案)》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미암일기(眉巖日記)》 《존양재선생문집(存養齋先生文集)》 《어우야담(於于野談)》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동야휘집(東野彙集)》 《청주양씨대동보(淸州楊氏大同譜)》(청주양씨대종회(淸州楊氏大宗會), 1993)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http://people.aks.ac.kr) 2. 연구논저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 상상, 2014. 김두종(金斗鍾),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탐구당(探求堂), 1966. 김헌ㆍ김남일, 〈‘비(否)’ 괘(卦)의 활용을 중심으로 본 《의림촬요(醫林撮要)》 속의 역학사상(易學思想) -《의학정전(醫學正傳)》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21권 1호, 2008.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2000. 김홍균(金洪均), 〈《의림촬요(醫林撮要)》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비교고찰(比較考察) -요통(腰痛)을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13권 1호, 2000. 김홍균(金洪均),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의사학적(醫史學的) 연구(硏究) -저자, 판본, 구성, 인용문헌 등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김홍균(金洪均),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림촬요(醫林撮要)》의 비교고찰(比較考察)〉,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14권 2호, 2001. 김홍균(金洪均)ㆍ김남일(金南一),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에 대하여〉, 《경희한의대논문집》 21권 1호, 1998. 김홍균ㆍ안상우,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의 침(針)과 침(鍼)에 대하여, 《한국의사학회지》 25권 2호, 2012. 성호준(成昊俊),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철학적 연구 -유학(儒學)과 도교(道敎) 사상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신순식(申舜植) 외, 《한국한의학사(韓國韓醫學史) 재정립(再定立)》 상하(上下), 한국한의학연구소, 1995. 안상우,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유취(類聚)’ 인용문에 대한 고찰〉,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13권 1호, 2000. 안상우, 〈《의림촬요(醫林撮要)》의 판본(板本)과 최근 연구 성과〉,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10권 1호, 2004. 안춘근(安春根), 《한국서지학원론(韓國書誌學原論)》, 범우사, 1990. 유희영(柳熙英),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의 의사학적(醫史學的) 가치(價値)〉, 《동의병리학회지》 1집, 1984.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미키 사카에(三木榮), 《조선의서지(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학술도서간행회(學術圖書刊行會), 1973. [주D-001]이 시기의 …… 의림촬요(醫林撮要)이다 : 《의림촬요》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미키 사카에와 김두종에 의해 이루어졌다.(미키 사카에(三木榮), 《조선의서지(朝鮮醫書誌)》 증수판(增修版), 학술도서간행회(學術圖書刊行會), 1973, 83~86쪽, 352~353쪽; 김두종(金斗鍾), 《한국의학사(韓國醫學史)》, 탐구당(探求堂), 1966, 298~299쪽.) [주D-002]양예수(楊禮壽) …… 찬술하였다 : 《의림촬요(醫林撮要)》 권1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 본국명의(本國明醫). “楊禮壽〔字敬甫, 號退思翁, 弘農人. 以醫術聞於世, 撰醫林撮要八卷.〕” [주D-003]의림촬요(醫林撮要) …… 교정(校正)하였다 : 《동의보감(東醫寶鑑)》 권1 역대의방(歷代醫方)(남산당 영인, 1981). “醫林撮要〔本國內醫鄭敬先所撰, 楊禮壽校正.〕” [주D-004]양예수(楊禮壽) …… 퇴사옹(退思翁) : 《내의선생안(內醫先生案)》(허준박물관 소장). “楊禮壽〔敬甫〕. 弘農人〔資憲, 行同樞兼司僕將, 陽川縣令, 號退思翁〕.”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는 종2품 벼슬이다. 맡은 관직(官職)의 품계가 자신의 품계보다 낮은 경우에는 ‘행(行)’을 관직명 앞에 붙이고, 반대로 관직이 자신의 품계보다 높은 경우에는 ‘수(守)’를 관직명 앞에 붙인다. 이것을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한다. 양예수는 정2품 품계인 자헌대부(資憲大夫)로서 종2품 관직인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으므로,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라고 표기한 것이다. [주D-005]양예수의 …… 같다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나 《동야휘집(東野彙集)》에는 다리병〔脚病〕을 핑계로 권세 있는 집안의 왕진을 사양하던 의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임진왜란 발발로 피난하게 되자 이 의관이 잘 걷게 되었으므로 이항복이 다리병에는 난리탕(難離湯)이 최고라고 농담하여 사람을 웃겼다는 이야기이다. 이 의관의 이름을 《연려실기술》에서는 양예수라고 하고, 《동야휘집》에서는 허준이라고 하였다.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 야사이므로, 본문에서 다루지는 않는다. [주D-006]명종 4년 …… 양건(楊建) : 이성무(李成茂)ㆍ최진옥(崔珍玉)ㆍ김희복(金喜福) 편(編), 《조선시대(朝鮮時代) 잡과합격자(雜科合格者) 총람(總覽) -잡과방목(雜科榜目)의 전산화(電算化)-》, 한국정신문화연구원(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0, 96쪽. 이 자료집은 현존하는 《의과방목(醫科榜目)》,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 《의과팔세보(醫科八世譜)》, 《의등제보(醫等第譜)》 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주D-007]명종 18년 …… 치료 : 《명종실록》 권29, 명종 18년 9월 20일(을미). 이때 세자가 사망하여 양예수는 후에 비난을 받았다(《명종실록》 권30, 명종 19년 12월 21일(기축)). [주D-008]명종 19년 …… 승진 : 《명종실록》 권30, 명종 19년 12월 21일(기축). 신하들은 양예수의 승진을 반대하였다(《명종실록》 권30, 명종 19년 12월 22일(경인); 12월 24일(임진)). [주D-009]명종 20년 …… 주장 : 《명종실록》 권31, 명종 20년 4월 12일(무인). [주D-010]명종 20년 …… 가자(加資) : 《명종실록》 권31, 명종 20년 10월 9일(임신). [주D-011]명종 22년 …… 하옥 : 《명종실록》 권34, 명종 22년 6월 28일(신해). [주D-012]선조 3년 …… 치료 : 《미암일기(眉巖日記)》 1570~1573년. [주D-013]선조 11년 …… 상소 : 《선조실록》 권12, 선조 11년 7월 4일(계축). [주D-014]선조 13년 …… 가자 : 《선조실록》 권14, 선조 13년 11월 27일(계사). [주D-015]선조 18년 …… 표기 : 《만력 13년 을유 8월 24일 사마방목(萬曆 十三年 乙酉 八月 二十四日 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73〕,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http://people.aks.ac.kr), 2014년 10월 7일 접속). [주D-016]선조 19년 …… 가자 : 《선조실록》 권20, 선조 19년 10월 8일(기사). [주D-017]선조 20년 …… 하사 : 《선조실록》 권21, 선조 20년 12월 9일(계해). [주D-018]선조 28년 …… 하사 : 《선조실록》 권62, 선조 28년 4월 25일(정묘); 권64, 선조 28년 6월 11일(임자). [주D-019]선조 29년 …… 치료 : 《선조실록》 권75, 선조 29년 5월 11일(정축). [주D-020]선조 30년 …… 반대 : 《선조실록》 권84, 선조 30년 1월 16일(정미). 이때 양예수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 하)로 승진한 것으로 추측된다. [주D-021]선조 30년 …… 치료 : 《선조실록》 권87, 선조 30년 4월 14일(갑술). [주D-022]선조 32년 …… 하사 : 《선조실록》 권115, 선조 32년 7월 24일(신미). [주D-023]선조 33년 …… 부의(賻儀) : 《선조실록》 권132, 선조 33년 12월 1일(경오). [주D-024]광해군 4년 …… 표기 : 《만력 40년 임자 3월 13일 사마방목(萬曆 四十年 壬子 三月 十三日 司馬榜目)》(고려대학교〔만송B8A1 1612A〕, 한국역대인물종합시스템(http://people.aks.ac.kr), 2014년 10월 7일 접속). [주D-025]젊은 …… 이야기다 : 유몽인, 신익철ㆍ이형대ㆍ조융희ㆍ노영미 옮김, 《어우야담 원문》, 돌베개, 2006. “楊禮壽, 昭敬大王朝太醫也.” [주D-026]양예수의 …… 있다 : 《미암일기(眉巖日記)》 1568년 10월 24일. [주D-027]부사(府使)이며 …… 갔다 : 청주양씨대종회(淸州楊氏大宗會), 《청주양씨대동보(淸州楊氏大同譜)》 권2, 1993, 특히 42~43쪽 참고. [주D-028]양지수는 …… 한다 : 《선조실록》 권132, 선조 33년 12월 1일(경오). [주D-029]양홍무는 …… 합격하였다 : 《만력 13년 을유 8월 24일 사마방목(萬曆 十三年 乙酉 八月 二十四日 司馬榜目)》(국립중앙도서관〔古朝26-73〕). [주D-030]양홍도는 …… 합격하였다 : 《만력 40년 임자 3월 13일 사마방목(萬曆 四十年 壬子 三月 十三日 司馬榜目)》(고려대학교〔만송B8A1 1612A〕). [주D-031]기운이 …… 빠짐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4년 4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영인, 1961). “氣化遷變, 風土各異, 有宜於古, 而不宜於今, 可用於中原, 而不可用於東土者, 取其適用, 捨其乖宜者, 始可爲全書. 以是往在宣祖朝, 命故名醫臣楊禮壽, 撰醫林撮要, 此書一出, 非但議藥劑藥之際, 人甚便之〔七字缺〕者, 一展卷而得知對證之劑, 其爲廣惠〔五字缺〕.” [주D-032]정경선(鄭敬先) 내의원 정 : 《내의선생안(內醫先生案)》(허준박물관 소장). “鄭敬先〔正〕.” [주D-033]정경선은 …… 한다 : 김홍균(金洪均),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의사학적(醫史學的) 연구(硏究) -저자, 판본, 구성, 인용문헌 등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15쪽. [주D-034]의림촬요는 …… 인용되며 : 안상우,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유취(類聚)’ 인용문에 대한 고찰〉,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13권 1호, 2000. 《의림촬요》와 《동의보감》의 계승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고된다.(김홍균, 〈《의림촬요(醫林撮要)》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비교고찰(比較考察) -요통(腰痛)을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13권 1호, 2000.) [주D-035]목활자(木活字)로 …… 2책이다 : 《의림촬요속집》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소개한 논문들이 있다(유희영(柳熙英),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의 의사학적(醫史學的) 가치(價値)〉, 《동의병리학회지》 1집, 1984; 김홍균ㆍ안상우,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의 침(針)과 침(鍼)에 대하여, 《한국의사학회지》 25권 2호, 2012). 유희영의 논문에는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의림촬요속집》 권2의 일부가 영인되어 있다. [주D-036]만력(萬曆) …… 있다 :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 권2(국립중앙도서관 소장). “萬曆三十六年九月日, 內醫院開刊. 監校官, 通訓大夫行內醫院判官臣李, 監校官, 通訓大夫行內醫院主簿臣李希憲.” [주D-037]의림촬요속집과 …… 것이다 : 인용 의서와 처방의 순서가 일치하는 예를 하나 더 거론하자면, 《의림촬요속집》 온역문의 이성구고환(二聖救苦丸 《의감(醫鑑)》에서 인용) → 우방금련탕(牛蒡芩連湯 《회춘(回春)》에서 인용)의 기록이 《의림촬요》 삼간본에서 그대로 재인용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주D-038]양예수가 …… 것이다 : 《의림촬요》〈중풍문〉 삼간본에는 통관산(通關散)이라는 처방이 2건 보인다. 하나의 병문에 동일한 처방 2개가 배치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그런데 2건 중 1건은 《의림촬요속집》의 통관산과 일치한다. 원래 양예수가 편찬한 《의림촬요》 초간본에 통관산 처방 1건이 있었는데, 《의림촬요속집》에서 별도로 통관산 처방 1건을 수록하였고, 나중에 《의림촬요》 삼간본에서는 이 2건의 처방이 한군데로 모이게 된 것이다. [주D-039]의림촬요속집 …… 另硏三字 : 《의림촬요속집(醫林撮要續集)》 권1 중풍문(中風門) 용성단(龍星丹). 원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용성단(龍星丹). 여러 종류의 풍열(風熱)로 인해 담연(痰涎)이 가득 찬 것을 치료한다. …편뇌(片腦 별도로 간 것 3자(字))ㆍ우황(牛黃 별도로 간 것 3자)ㆍ사향(麝香 별도로 간 것 3자)….” [주D-040]의림촬요 …… 各三字 : 《의림촬요(醫林撮要)》 권1 중풍문(中風門) 용성단(龍星丹). 원문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용성단(龍星丹). 여러 종류의 풍열(風熱)로 인해 담연(痰涎)이 가득 찬 것을 치료한다. …편뇌(片腦)ㆍ우황(牛黃)ㆍ사향(麝香 모두 별도로 간 것, 각 3자(字))….” [주D-041]의림촬요속집의 …… 묶였다 : 또한 《의림촬요속집》 권2를 살펴보면 인후문(咽喉門), 혈증문(血證門), 뉵혈문(衄血門), 각혈문(咯血門), 익혈문(溺血門), 하혈문(下血門), 치루문(痔漏門), 자한문(自汗門), 임폐문(淋閉門), 관격문(關格門), 조결문(燥結門), 황달문(黃疸門), 상손문(傷損門), 창양문(瘡瘍門), 부인문(婦人門), 소아문(小兒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의림촬요》 원본의 병문 배치순서와 대체로 일치한다. 《의림촬요속집》의 병문에서는 병론이 생략된 채 처방들만 배치되어 있다. 즉 《의림촬요》 초간본에 추가되었으면 좋았을 처방들만을 뽑아 2권짜리 간략한 처방집으로 편찬한 것이 《의림촬요속집》이었다. [주D-042]의림촬요속집이 …… 만들어진다 : 《의림촬요》에 수록된 〈역대의학성씨〉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고된다(김홍균(金洪均)ㆍ김남일(金南一),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에 대하여〉, 《경희한의대논문집》 21권 1호, 1998). [주D-043]허준(許浚) …… 찬술하였다 : 《의림촬요(醫林撮要)》 권1 〈역대의학성씨(歷代醫學姓氏)〉. “許浚 字淸源…官至崇祿大夫陽平君, 贈領議政. 撰東醫寶鑑二十五卷ㆍ諺解痘瘡集一卷ㆍ諺解胎産集一卷ㆍ諺解救急方一卷ㆍ新纂辟瘟方一卷.” [주D-044]의림촬요 …… 나타났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4년 4월 5일. “醫林撮要進上之外, 分置醫司, 流布外方, 而散失於賊适之變, 今者收聚外方分賜之冊, 而卷秩不具, 藥材兩〔一字缺〕取考之際, 未免奔走閭閻, 而鄕藥集成方, 則遼路〔二字缺〕之後, 方爲印出, 而反正之初, 多事停罷, 此一書, 皆列聖軫念民生, 非命夭札, 成此惠治之方, 不但爲內局, 〔一字缺〕用之地也. 其仁惠養育之盛意, 豈啻宋之刊行□劑而已哉? 今若依例使校書館印出, 則事未易就, 而徒費工匠料布, 今戶兵兩曹, 雖無所儲, 如得三四同綿布, 五十石大米, 則可以隨時低昂, 買賣取剩, 而更不煩該司, 令戶兵曹, 依此數上下, 俾得無弊印出, 何如? 傳曰, 知道. 詔使回還後爲之.” [주D-045]인조 …… 보고하였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2년 10월 9일. “徐景雨啓曰, 內醫院官員, 以都提調言來言, 醫林撮要印出工匠料布, 以各衙門所儲, 隨力助給事. 入啓蒙允後, 八月初一日始役矣. 各衙門已爲輸送者, 都体府一同, 摠戎廳ㆍ常平廳一同, 司僕寺一同, 合四同而三朔料布, 分給已盡. 御營廳亦當送一同, 而時未送之, 計其功役, 來正月望間, 當爲完畢, 而料布更無出處, 極爲可慮. 每朔所用, 不過七十餘匹, 今後令該曹, 限數月題給, 何如云. 故敢啓. 傳曰, 依啓.”;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13년 2월 22일. “醫林撮要則自內局印頒, 今才畢役.” [주D-046]인조의 …… 삼았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인조 24년 10월 28일. “都提調ㆍ提調ㆍ同副承旨臣南翧再啓曰,… 醫林撮要耳病門, 透耳筒, 治耳聾腎虛, 耳中如風水聲, 如鐘鼓聲.”;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현종 원년 2월 5일. “藥房三啓曰, 臣等退與鄭後啓等諸醫官, 更議進御之藥, 則皆以爲醫林撮要中, 加味菊花散, 治風熱, 內外諸般障目, 加羚羊殼七分, 蟬退五分以進, 最爲合宜, 羊肝丸兼進爲當云.” [주D-047]권1의 …… 추측된다 : 《의림촬요》의 권별 분량은 균등할 것으로 판단되는데, 〈역대의학성씨〉가 권1에 포함되어야 권별 분량이 일정해진다. [주D-048]국왕은 …… 하사하였다 : 안춘근(安春根), 《한국서지학원론(韓國書誌學原論)》, 범우사, 1990, 190쪽; 강명관,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천년의 상상, 2014, 341~343쪽 참고. [주D-049]강희(康熙) …… 있다 : 《의림촬요(醫林撮要)》(서울대 규장각 소장, 청구기호 古 7608-8). “康熙十五年十一月十九日, 內賜行副護軍□□□醫林撮要一件, 命除謝恩, 右承旨臣丁〔手決〕.” [주D-050]강희 …… 있다 : 《의림촬요(醫林撮要)》(대구가톨릭대도서관 소장, 청구기호 동519.8-양64ㅇ). “康熙十五年十一月十九日, 內賜吏曺佐郞李聃命醫林撮要一件, 命除謝恩, 右承旨臣丁〔手決〕.” [주D-051]숙종 …… 하사받았다 : 《존양재선생문집(存養齋先生文集)》 부록(附錄) 권1 연보(年譜)(《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속(續)》 권32, 민족문화추진회 영인, 2007). “丙辰〔先生六十五歲〕. … ○十一月呈病還鄕, 特賜醫林撮要一部.” [주D-052]의림촬요 …… 소장처 : 〈표2〉 외에도 한국국학진흥원에는 권수 미상의 《의림촬요》 5책이 소장되어 있으며, 《의림촬요》 필사본이 경북대와 원광대에 1책씩 소장되어 있다. 한편 《의림촬요》의 해외 소장본, 필사본, 번역본 등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고된다(안상우, 〈《의림촬요(醫林撮要)》의 판본(板本)과 최근 연구 성과〉, 《한국한의학연구원논문집》 10권 1호, 2004). [주D-053]서울대 규장각 : 서울대 규장각의 《의림촬요》 중 권10은 별도의 청구기호(奎古 645)로 소장되어 있다. [주D-054]이상에서 …… 같다 : 김홍균은 선조 초기에 이미 《의림촬요》 간행본이 있었고, 1589~1592년 사이에 정경선이 찬(撰)하고 양예수가 교정(校正)한 8권본이 발간되며, 1608년에 이락(李絡)과 이희헌(李希憲)이 찬(撰)한 《의림촬요속집》이 발간되고, 1777년(정조 원년) 무렵에 《의림촬요》 12권본이 발간되었다가, 1777년(정조 원년)~1782년(정조6) 사이에 《의림촬요》 13권본이 완성된다고 주장한다(김홍균,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의사학적(醫史學的) 연구(硏究) -저자, 판본, 구성, 인용문헌 등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이에 대한 검토는 본문의 논의로 대신한다. [주D-055]중국 …… 것이었다 : 《의림촬요》〈역대의학성씨〉에 추가된 의학자들에 대해서는 김홍균,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의사학적(醫史學的) 연구(硏究) -저자, 판본, 구성, 인용문헌 등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76~77쪽 참고. [주D-056]중풍문(中風門)에서 …… 같다 : 《의림촬요》에는 병문마다 작은 글씨로 일련번호〔細註〕가 붙어 있는데, ‘중풍문 1’에서 ‘잡방 120’까지로 구성되어 있다. [주D-057]금원사대가의 …… 하였다 : 신순식(申舜植) 외, 《한국한의학사(韓國韓醫學史) 재정립(再定立)》 상하(上下), 한국한의학연구소, 1995, 249~260쪽; 김호, 《허준의 동의보감 연구》, 일지사, 2000, 118~121쪽; 성호준(成昊俊),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철학적 연구 -유학(儒學)과 도교(道敎) 사상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1, 87~89쪽. 반면 《의림촬요》와 금원사대가 사이에는 깊은 영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김홍균(金洪均), 《《의림촬요(醫林撮要)》의 의사학적(醫史學的) 연구(硏究) -저자, 판본, 구성, 인용문헌 등을 중심으로-》,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김헌ㆍ김남일, 〈‘비(否)’ 괘(卦)의 활용을 중심으로 본 《의림촬요(醫林撮要)》 속의 역학사상(易學思想) -《의학정전(醫學正傳)》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21권 1호, 2008). [주D-058]옛사람들의 …… 하였다 : 《의림촬요(醫林撮要)》 권1 중풍문(中風門). “昔人主乎風, 河間主火, 東垣主氣, 丹溪主濕.” [주D-059]단계심법부여(丹溪心法附餘) …… 소개하였다 : 물론 《의림촬요속집》에서는 《득효방》이나 《화제국방》 등의 처방들도 인용한다. 《의림촬요속집》이 양예수가 편찬한 《의림촬요》에서 누락한 처방들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주D-060]동의보감의 …… 노력이었다 : 이경록, 〈조선전기 《의방유취》의 성취와 한계 -‘상한’에 대한 인식을 중심으로-〉, 《한국과학사학회지》 34권 3호, 2012 참고. [주D-061]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 높다 : 《의림촬요》와 《향약집성방》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이 참고된다(김홍균,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과 《의림촬요(醫林撮要)》의 비교고찰(比較考察)〉, 《한국의사학회지(韓國醫史學會誌)》 14권 2호,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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