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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19일 목요일

이제마 사상체질 사상의학

[기획 특집]진해현 현감 이제마

사상의학의 창시자 동무(東武) 이제마(李濟馬/1837~1900)가 경남에서 현감을 지냈다는 사실은 일반인들에게 크게 알려진 사실은 아니다. 이철호 작가의 ‘소설 이제마 장편소설’을 비롯해 지난 2002년 KBS 2TV에서 방영했던 드라마 ‘태양인 이제마’ 등으로 그의 존재가 알려지기는 했으나 동의보감 허준에 비해서는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세계 각 국으로부터 사상의학 등 한의학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면서 이제마를 새롭게 조명해야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제마가 경남 창원 진해현(鎭海縣) 현감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은 글로벌 의료관광도시를 표명하는 창원시의 정책에도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본지는 3회에 걸쳐 기획특집으로 이제마를 다룬다.                                                                               편집자 주  

1/이제마 그는 누구인가

2/진해현 현감 이제마

3/사상의학과 의료관광 글로벌화

 
 
▲ 진해현 동헌으로 들어가는 사주문 전경.

구한말 진해는 현재의 진해구가 아니라 마산합포구 진동면이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鎭東面)은 일제 강정기 이전에는 진해현(鎭海縣)이었다.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진동면은 서쪽은 진북면, 동쪽은 구산면, 현동 등과 접한다. 북쪽은 대산(726m)을 경계로 마산회원구와 접하고 남쪽은 바다에 접한다.

대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면의 서쪽을 남류해 바다로 유입되는 태봉천을 따라 취락지가 형성돼 있다. 진동면은 조선시대 진해현이 소재한 동면(東面)으로 1908년 창원부에 병합됐다. 1995년 마산시에 편입됐다가 2010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면이 됐다. (참고자료/지방지도 1872년 지방지도 중 진해현 지도부분, 해동지도 1750년대 진해현 지도 부분 ).

구한말 당시 진해현 읍치(邑治) 관할은 서면, 북면, 동면(진해현 소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이 러시아 함대를 견제하기 위해 진해현(현 진동면)에 위치에 있던 군항지를 지금은 없어진 당시 웅천군 한 작은 해안마을로 옮기면서 지역 명칭이 진동면으로 개명됐다. 그리고 당시 군항지가 옮겨진 웅천군은 현재의 창원시 진해구가 됐다. 결국 진해라는 지역 명칭은 일제에 의해 강제적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진해구는 조선시대 문종(재위1450년~1452년)때 웅천현(熊川縣)이었으나 1895년(고종 32) 웅천군으로 승격했다. 1914년 창원군에 통폐합돼 웅천면이 됐으며 1973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대부분 진해시로 편입된 후 웅천 1·2동으로 지역이 나눠져 있다. 2010년 창원, 마산, 진해시가 통합, 창원시로 출범하면서 창원시 진해구가 됐다. 

창원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에 진해현은 독립적인 행정단위의 읍치가 있던 곳. 진해현은 고려시대에 현이 설치된 이후 한때 진주의 속현으로 또는 창원부에 속하기도 했으나 오랜 세월 현으로 유지돼 온 것은 큰 마을은 아니었으나 조선시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자리매김돼 왔기 때문이다. 

진해현 관아는 1832년(순조 32) 진해현감 이영모가 세웠다. 그 뒤 진해현 부지내에 진동면사무소가 들어서고 객사는 삼진 중학교 교사(校舍)로 사용하다 1983년 5월 객사가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됐다. 이후 동헌(東軒)과 일부 부속건물이 건립된 뒤 1985년 11월 14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44호로 지정됐으며 현재는 창원시에서 관리해 오고 있다. 이제마가 관리로 국내에서 유일하게 근무한 곳이 진해현이라는 사실은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는 평가다. 현재 면사무소는 타 지역으로 이전했으며 대부분의 부지는 지역주민들의 임시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872년 제작된 ‘지방지에’ 의하면 진해현의 읍치에 대해 개략적인 지역 명칭들이 나오지만 진해현의 구조 등에 대해서는 현재 남아 있는 자료가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건립 당시 건물의 배치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 지방 관아를 근거로 추정하는 바로는 동헌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군령(軍令)을 출납하는 사령청(使令廳)이 있었고, 좌측에는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숙소였던 객사(客舍)가 있었으며, 동헌 앞으로는 말을 사육하던 마방(馬房)과 지방의 형사를 관할하던 형방소(刑房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주문(四柱門) 앞에는 역대 현감의 석비군 16기가 있다. 흩어져 있던 비를 동헌 건립 때 한 곳으로 모아 비석 군을 조성했다. 이 석비군 중 이제마의 비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공덕비가 세워졌다고 해서 이상적인 목민관으로 볼 수는 없다. 당시 탐관오리도 이런저런 이유로 공덕비를 세웠다는 역사적 기록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석비군 16기 중 상태과 그런대로 양호한 12기 정도를 제외하면 나머지 4기는 훼손이 심해 내용을 알 수 없는 점이 아쉬움을 준다. 이들 비석중에 이제마의 비석이 있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 지역민들에게 구전되고 있다. 그 이유는 이제마가 1886년 진해현 현감으로 부임한 뒤 1889년까지 34개월 정도 현감으로 근무할 당시 진해현 인근 장기리, 고현리, 태봉리 등 15개 리(참고자료/구한국행정구역일람)등를 비롯해 웅천과 고성 등 다른 지역을 돌며 많은 병자를 치료했을 것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자료에는 1886년 종6품 진해현감 겸 병마절도사로 제수됐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조선에는 현감은 138명 안팎으로 전해진다.

그의 학문과 무공, 사상과 특별한 의학지식 등 당시 시대에 고착화된 이념을 뛰어넘는 다소 기인적인 기질을 감안 할 때 이철호(한의사 겸 작가)가 쓴 ‘소설 이제마’의 일부 내용에 공감을 가진다. 그 내용중에 국내외적으로 시국이 안정되지 못하고 어수선시절 당시 ‘탐관오리들과 달리 충심으로 백성을 위하고, 부조리를 척결하며, 어떤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는 청렴결백함을 보인다’고 기술했다.

이어 ‘병자를 치료함에 있어 그의 행동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병자인 처녀에게 갑자기 옷을 벗게 하는가 하면, 선비에게 장작을 나르게 하고는 그것을 제자리에 다시 갖다놓도록 시키는 등, 그의 행동과 언사는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엉뚱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행동은 병자의 체질을 알기 위한 독특한 방법이었고, 그런 방법을 통해 숱한 병자를 구해냈다. 해서 그의 기인다운 행동을 감히 경멸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그의 비범한 행동과 놀라운 관찰력은 만인의 추앙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들 내용은 일부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만들어진 스토리 이른바 팩션(Faction)으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인생 여정을 보면 상당부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이제마는 진해현 현감으로 근무하면서 소설의 내용처럼 다소 파격적으로 업무를 수행했을 가능성과 병자치료에 많은 역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에서는 이제마 생전, 특히 관직에 있을 무렵에는 한의사로서 크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전통적인 약제조제가 아니라 새로운 조제법 등을 사용함으로써 병자들이 기피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아울러 자신의 아내와 동생, 제수, 조카 등이 병으로 사망한 것을 두고 의원으로서의 능력과 자질 등에 대해 이런저런 비난을 받았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그가 창시한 사상의학은 한·중·일 등 동남아시아 전문가들은 물론 이들 국가 국민으로부터도 경의로운 전문 의서로 평가받고 있다.  

 
 
▲ 진해현 관아 석비군, 모두 16기가 세워져 있다.

김선환 중부취재본부 국장 kshwil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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